저는 가난하지만 가문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 났으며 ‘낳으면 딸 낳으면 딸’이었다는 어머니의 아쉬움 속에서 2남 5녀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골 산골에서 광주로 유학을 가서 부모님의 희망과 빛으로 대우받으며 지냈지만 중·고등학교 때 광주 동명 교회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한국 대학생 선교회에서 활동하다가 졸업 후 시골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이웃 초등학교에 계시던 신앙심 깊은 여교사(아내 김성자 집사)를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장에서 문제가 발생되었습니다.
폐백 드리기 전에 성주상에 절을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강요와 하나님 외에는 숭배 할 수 없다는 새 며느리의 주장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났고 결국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제 짝을 만나더니 부모에게 순종치 않는다는 슬픔과 좌절이 온 집안에 먹구름을 일게 했습니다.
그후 신혼의 아내가 한동안 핍박을 받기도 하였지만 착하고 성실한 아내의 효성심에 녹아진 부모님들께서는 여동생들에게도 “너희들도 작은 새 언니처럼 예수를 믿으라.”라고 강조하실 정도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큰형님에게는 결혼 후 7년동안 자녀가 없었는데 저희 부부에게 딸 혜림이와 아들 혜성이를 선물로 주셔서 주님을 섬기는 기쁨은 더하여 갔으며 이로써 가정복음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수님과 여동생들에게 전도를 하였고 부모님께서도 늙어서 일을 못하게 되시면 교회에 나가시겠다며 “우리도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하시며 명절 때도 예배로써 차례를 대신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무렵 영광 원자력 발전소 1∼4호기 건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외부에서 많은 인구 유입으로 2000명 정도가 예배드리는 성전을 짓는데 건축 위원과 청장년 회장직을 맡으면서 에벤에설 선교단을 창단하여 전국 공연 및 테이프 판매 수입으로 선교 사업에 사용하며 섬기던 중 88년 안수 집사로 임직을 받고 정든 영광읍 교회를 떠나 안산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7남매의 막내로 자란 아내는 친정에서 유일하게 예수를 믿는 불씨와 같은 존재였으며 가정 예배 때마다 다섯 처남들과 처남댁들, 처형을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속 번져가는 전도의 불길에 사탄이 저희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습니다.
안산으로 이사온 지 삼 년만에 아내는 자궁내막증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으며 수술 후 장이 조금 아팠지만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함께 성지순례도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아픔속에 석달 후 병원에서 궤양성 대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서울대 병원 내과 의사인 처조카로부터 병명을 전해들은 처남들은 모두“예수 잘 믿는 막내는 불치병이 걸려서는 안된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잘 살아야 남에게 덕이 된다.’고 생각한 우리 가정에 폭풍우와 같은 고난이 밀려온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어 학교를 휴직하고 출산 직후에도 쉬지 않았던 주일 학교 교사직마저 쉬게 되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가거나 금방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때도 있었고, 새벽에 일어날 때 움직이지 않으면 혹 잘못되지나 않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얼굴을 만져보고 깨우기도 했습니다.
나는 두 자녀 혜림, 혜성이와 함께 울면서 하나님께 아내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뜬눈으로 날을 새는데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욥의 고백이 떠 올랐습니다.
“착하고 예수 잘 섬기는 엄마가 아픈 것은 우리 가족이 회개하라는 명령이니 함께 기도하자!”고 아이들에게 권하며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아내의 쾌유를 위해 구역예배, 남선교회, 철야예배 때도 기도를 부탁드렸고 기도문을 써서 책상 사무실과 화장실에 붙여 놓고 눈만 뜨면 읽고 기도하던 중 카안자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집회를 마치고 광림교회 집회에서 설교 도중 아내의 병 증세를 이야기하며 “이런 부인 나오세요. 하나님께서 지금 고치신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수를 받고 입신 후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깨어난 아내는 하나님께서 고치셨다며 좋아하였습니다. 할렐루야!
그 후에도 병세는 계속 되었지만 하나님의 치료하심을 믿고 좌절하지 않고 찬양하면서 억지로라도 웃고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런 우리 가정에 주님께선 투병 생활 5년만에 세상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고 아직 병의 원인도 규명되지 않았다는 불치병에서 해방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2000년 1월 6일 한국의 장 전문 권의자인 서울대 병원 내과 박사가 의학연구용으로 쓰겠다며 완치된 아내의 혈액을 최초로 채혈 하였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연단하시고 변화시키시며 축복주심을 깨닫습니다.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23:10-11)”
작년 송구 영신 예배 때 아내가 말씀 카드로 받고 영육간에 건강해지고 학교 복직 또한 축복받은 말씀을 새 천년에는 저에게 말씀 카드로 주셨음을 보는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짜릿한 느낌을 받고 “아멘”하고 외쳤습니다.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는 앎이라 (약1:2-3)”
다른 분들은 생각하기도 싫은 IMF 체제의 2년여 동안 저에게는 에덴 기획, 에덴 건설 중기등 제 사업에 축복을 주시어 5억 정도의 부동산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건강, 물질, 자녀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혹시 제가 어려웠던 지난 시절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며 늘 말씀과 기도로 묵상합니다.
전원의 도시 안산은 저에게 주신 축복의 땅이요, 아브라함의 고향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이기에 우리 가족 모두는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때까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일에 앞장 서리라 다짐 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아멘.
- 황인수 안수집사(11-2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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