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 년 평양에서 부모님의 3대 독자로 태어난 저는 신의주 학생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46년에 월남하였습니다.
서울에 와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평양 사투리를 쓰다 보니 북에서 온 아이라고 놀리는 급우들이 많아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 권투와 태권도를 배우며 체력을 다졌습니다.
6·25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동족끼리 서로 총을 겨누는 가슴아픈 전쟁을 겪은 후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28세에 결혼하여 서울에서 자영업을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되었습니다.
제가 번 돈을 죽을 때까지 다 쓰고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입이 좋았고, 2남 1 녀의 자녀들과 함께 행복한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그러던 68년, 수원에 있는 철도청 용역 회사의 회장이 사택까지 마련해 주겠다며 함께 일해 줄 것을 제안해 왔습니다. 하던 일이 한참 성과가 좋을 때라 망설였지만 안정된 직장과 좋은 직책을 제안해서 가족들은 서울에 두고 저 혼자만 수원으로 옮겨 와 근무를 하기로 했는데, 철도 레일의 받침목을 구워 내는 일을 하는 그 회사에서 저는 회장님의 각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69년 11월 9일, 한 부하 직원이 갓 결혼 후 예비군 훈련을 다녀왔는데, 또 숙직을 서야 한다며 울상을 지어서“내가 대신 숙직을 서 줄 테니 집에 가서 쉬고 오라.”며 그 날의 숙직을 자청했습니다.
그 밤은 날씨가 궂고 유난히도 비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숙직실에 연탄불까지 꺼져 새벽 추위에 도저히 더 누워있을 수가 없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는데 우연히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모임에 참석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집에 못 들어가셨다며 아침이나 함께 먹자고 하셔서 해장국 집에 들른 후, 차를 타고 회사를 한 바퀴 돌아보던 중 저는 피곤하니 집에 가서 쉬고 오겠다며 뒷문에서 내렸습니다.
뒷문은 출입을 위해 열려 있진 않지만 직원들이 요청을 하면 경비원이 문을 열어주곤 하던 터라 뒷문을 통해 지름길로 집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문을 나오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경비를 위해 쳐 놓은 울타리에 코트 자락이 걸렸습니다. 옷을 빼내려고 몸을 움직이던 중 간밤의 비에 젖었던 길에 미끄러져 제가 그만 철로 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덜커덩 소리와 함께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들었는데 피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왠지 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이러다간 죽겠구나.’하며 기차는 팔과 가슴 위로 지나갈 것을 예상했는데 죽더라도 비참한 모습은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다리를 올리며 구르기를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시커먼 것이 다가와 저를 덮쳤고 4량의 기차로부터 1량에 2번씩 모두 8번을 내리눌러 찍히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마치 누군가가 끌어당기는 불행의 덫에 강제적으로 말려들었다고 느끼면서, 저는 딸아이의 얼굴을 떠올렸고 큰아들, 작은아들이 동네를 돌며 놀고 있을 생각을 하면서 저자신도 모르게 “하나님! 살려 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기차가 멈추고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 같았는데 저는 앞이 캄캄해지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곁에 왔다는 것을 알고 저는 차근차근 말을 했습니다.
“저는 여기 직원으로 지금 허리를 다친 것 같은데 들 것 같은 것에 저를 실어 조심스럽게 다루어 병원으로 옮겨 주십시오.”하고 말하니 어떤 여인이 옆 사람에게 해 달라는 대로 해 주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옆의 남자가 “저 피를 좀 보세요. 저렇게 피를 흘리는 것을 보니 이 양반은 지금 정신이 없어서 하는 소리 같은데 들을 필요도 없어요.”하고 한 사람이 저를 들쳐 없고 트럭에 싣더니 병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사고 직후 잘 다루어 주었더라면 큰 장애는 면할 수도 있었다는데, 척추를 많이 다친 저는 4년 6개월 간의 병원 생활을 하면서 저 자신의 과실로 일어난 일이라 회사의 보상도 전혀 받지 못하고 집 4채를 팔아 치료비에 보탰습니다.
병원 생활을 하면서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느냐를 생각하며 비관도 많이 했습니다
그 때까지 살면서 남에게 잘못한 기억도 없었고‘그 날도 남을 대신해 숙직을 해 주다가 이런 일을 당했는데’라는 생각에 아마 저의 전생에서 지은 죄가 컸었을 것이라는 자책도 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무종교주의자였으나 다치던 날 저도 모르게 “하나님! 살려 주세요.”를 외쳤던 것을 기억하며 앞으로 나아서 퇴원하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은혜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진작 신앙적 관점에서 제 삶의 중심을 찾았더라면 그 많은 재산을 치료비로 쓰지 않고 값지게 쓸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입원해 있던 병원은 수원 기독병원으로 원목과 수원 제일교회의 자원 봉사자들이 병실을 자주 방문해 주었습니다. 그 중 한 대학생에게 “나는 건강이 나빠 30분 이상은 대화하기가 어려우니 시간이 날 때마다 내게 와서 성경에 대해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를 통해 저는 신앙적인 첫 만남의 길을 열었습니다.
퇴원 후 대전으로 내려와 집 근처의 대전 제일교회에 나가기를 희망했으나 몸이 자유스럽지 못해 망설였는데, 제가 3륜 오토바이를 타고 교회 앞까지만 가면 그 교회의 장로님께서 등에 업어 교회 안으로 들어가 앉혀 주셨습니다.
그렇게 1년 반을 교회에 다니며 제가 기차에 치인 것은 전생의 죄가 아니라 저 자신의 교만 때문이며, 비록 장애인(1급 1호)으로 살지만 영생을 얻음은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심이니 앞날의 삶을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는 제 병간호와 가정의 생계를 꾸리느라 힘이 들었던지 위암 3기라고 진단을 받고, 25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나 버렸습니다.
저는 다칠 때 충격으로 횡격막이 위로 올라가면서 각 장기의 손상을 입은 탓에 수 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몸이 자꾸 약해져 병원에 갈 일이 자주 생기면서 안양에서 직장에 다니는 큰아들의 자취방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기려 했으나, 아무도 제게 집을 내주려 하지 않아 안산에 살던 처제의 집으로 큰아이와 함께 이사를 왔습니다.
안산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장애인을 위한 영구 임대 아파트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신청하여, 91년도부터 제가 이름 붙인 회색의 감옥 (1302동 119호)에서 무기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잘 자라서 가정을 이루었지만 저는 그들에게 짐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아 제 형기를 마칠 때까지 혼자서 살 예정입니다.
제일 교회와는 인연이 깊은 지, 이곳에서도 안산 제일교회의 여 집사님들이 자원봉사로 나오시며 한 분은 저를 차에 태워 교회에 데리고 다니시더니 제가 95년 휠체어에 앉은 채 고 훈 목사님께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병원이나 교회에 가기 위해 휠체어를 타는 것은 혼자서 할 수가 없어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정기적으로 저를 찾아 오셔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손길들이 있어 이 분들의 힘을 빌립니다. 공익 근무요원, 자원 봉사자, 제일교회의 가정 봉사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어느 때는 누군가의 물질적인 도움보다 인간적인 정이 그리워 이들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고를 당하는 순간 하나님을 믿은 적도 없었던 제가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외쳤던 것처럼 주님은 제가 주님을 찾기 전에 저를 이미 지목하여 부르고 계셨음을 믿습니다.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이 세상에 사람처럼 무능하고 무력한 동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신앙으로 무장한 강한 사람이 되어야 제가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며, 건강에 여유가 생기면 성경도 읽고 목사님의 말씀 테이프도 듣습니다.
사고 후 30년 동안, 죽음 직전의 위험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서 이렇게 2000년도의 달력을 읽으며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남은 소원이 있다면 어서 남북이 통일되어 자식들 손잡고 고향에 가보는 일입니다.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기도 드립니다.
- 김창균 성도 (2-가 남성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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