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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의 진상


☞목차

1. 중국의 5천년 역사.

1. 3국 5호 16국 이란.

1. 5대 10국으로 분열.

1. 동북공정의 문제점.

1. 동북공정의 추진이유.

1. 잃어버린 간도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1. 잃어버린 옛영토 연해주와 간도땅을 회복하자.



「중국의 5천년 역사」

중국민족은 지금부터 5천년전 황하 중류에서 묘족(苗族) 이란 이름아래 태어났다.
요순시대(堯舜時代)와 하(夏),은(殷),주(周) 나라를 거쳐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550년)를 통해 수백개의 나라가 평정되면서 진(秦)나라 진시왕이(BC221년)
중국대륙을 최초로 통일하였다.
그당시 공자, 노자, 맹자, 순자등 여러학자들의 사상적 논쟁을 통해 제자백가(諸者百家)에 의한 사상혁명을 거쳤다.
이때가 중국문화를 가장 꽃피우면서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나타나게 된것이다.
BC202년 항우가 자살한이후 유방이 한(漢) 나라를 건국했다.
AD 1년 왕망이 한나라를 멸하고 신(莘) 나라를 건국하였다.
AD 25년 유수가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광무제(光武帝)로 즉위 후한조(後漢祖)를 설립하였다.

「3國 5호(胡) 16國 이란」

중국의 한족(漢族)인 후한(後漢)이 멸망한 이후 중국대륙에서 3백년간 분열과 혼란기를 말하는 것이다. 후한말기(後漢末期) 184년 황건족(黃巾族)의 난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군웅 할거(群雄割據)의 형세가 펼쳐지면서 중국대륙은 분열의 시대를 맞는다.
201년 조조가 화북(華北)일대를 지배하고
207년 제갈공명(諸葛孔明)이 유비를 섬기게 된다.
208년 적벽대전(赤壁大戰)으로 유비가 손권과 함께 조조를 격파하여 중국영토가
3국으로 분열된다.
220년 조조(曹操)가 한제(漢帝)를 폐위(廢位)시키고 위(魏)나라를 건국
221년 유비(劉備)가 촉(蜀) 나라를 건국
222년 손권(孫權)이 양자강 이남의 강남지역에 오(吳)나라를 건국
중국 소설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삼국지(三國志)의 주무대였던 삼국시대를 마감하고 사마염이 조조의 위나라에 이어 서진(西晉)을 세웠다. 손권의 오나라 지역인 강남은 사마씨의 일족이었던 사마예가 동진(東晋)을 건국한다.

그이후 서기316년 4세기 초엽에 백수십년간 화북에는 흉노(匈奴:징기스칸의 조상), 말갈(靺鞨:퉁크스족), 선비(鮮卑:터키계),저(티베트계), 강(羌:티베트계)의 5호(胡오랑캐족)가 잇따라 정권을 수립하여 서로 흥망(興亡)을 되풀이 하였다.
이들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중원(中原)으로 들어오면서 한족을 제압(制壓)하여 이민족인 오랑케가 중국을 최초로 지배하게 된다.
한편 권력다툼으로 피폐(被廢)해진 사마염의 서진은 오랑캐족을 막지못하고 남쪽으로 쫓겨나게 된다.
이러한 5호는 중국대륙에 자신들의 국가를 세웠으나 오랑캐족들의 국가들은 중원의 한족문화(漢族文化)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망하여 짧은 역사속으로 사라져 갔다.
중원을 중심으로 과거 조조의 위나라와 유비의 촉나라 북쪽지역에 세워진 나라의
수가 무려 16개국에 이르게되어 중국북부는 분열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5호 16국이 있었던 양자강 이북의 왕조들을 북조(北朝)라 불렀고 손권의 오나라 지역인 강남의 왕조들을 남조(南朝)라 하는데 이들은 270여년간 통일되지 못한체 분열 되었다.

중국북부는 북위(北魏)가 통일하고 중국남부는 송나라의 유유가 통일함으로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가 열리게 된것이다.
그리하여 북조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後周)의 선양을 받은 수문제(隨文帝)가 수나라를 이들 남조와 북조는 통일을 이루게 된것이다.

중국역사에서 진시왕의 진나라(기원전221-208년)와 더불어 수양제(隨煬帝)의 수나라(589-607년)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평가를 크게 받는 것은 두나라 가 각각 3백년의 가까운 중국대륙에서의 분열기를 통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5代 10國으로 분열」

수나라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이후 당태종은 고구려를 섬멸하기 위해 당나라를 건국하여 신라와 연합으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당(唐)나라가 멸망한 907년부터 송(宋)나라가 전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979년까지의 약 70년에 걸쳐 중국대륙이 재차 분열하게되는 시대를 말한다.
특히 그 당시에 북방의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등오랑캐족이 가장 많이 창궐하여 한족을 3백여년간 지배했다.

5代는 후양(梁), 후당(唐), 후진(晉), 후한(漢), 후주(周)의 5왕조를 말하는 것으로 사가(史家)들이 그 이전에 존재했던 같은 이름의 왕조국가들을 구별하기 위해 앞에 후(後)자를 붙였다.
후주(後周)의 근위군(近衛軍)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960년 송나라를 건국한 이후 여러나라를 병합해서 중국대륙을 재통일하게 된다.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은 여진족의 침입을 피해 수도를 강남의 임안으로 옮길때까지 9대 168년간을 북송(北宋)이라고 한다.
1127년 송나라 고종이 도읍을 임안으로 옮긴때부터 징기스칸의 원나라에게 멸망할때까지 9대 152년간을 남송(南宋)이라고 한다.

진시왕의 진(秦)나라가 멸망한 이후 한(漢), 수(隨), 당(唐), 송(宋), 명(明) 나라를 거치면서 한족(漢族)인 손문(孫文)이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10.10)을 통해 만주족인 청(淸)나라를 몰아낼 때까지 중국은 북방의 오랑캐인 소수민족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침략을 받아왔다. 중국의 한족은 신해혁명전인 청나라 말기까지만 해도 한족으로써 오랑캐족인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와 몽골족인 원나라에 의해 중국 대륙이 지배 당했던 것을 민족적인 수치로 여겨왔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흉노족(匈奴族)에게 굴복하여 공물을 바쳤고 퉁구스족의 말갈(靺鞨)은 수(隨)·당(唐)나라를 침략하였다.
또한 거란족(契丹族)의 야울아보기(耶律阿保機)가 요(遼)나라를 세워 중국대륙을 2백년간 통치하였으나 뒤이어 여진족(女眞族)의 아구다(阿骨打)가 금(金)나라를 세워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백년간 지배하였다.
징기스칸(成吉思汗)의 몽고족(蒙古族)인 원(元)나라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백년간 지배했고 17세기(1644년)에는 만주족(滿洲族)의 누르하치(如兒哈赤)가 명(明)나라를 멸망시키고 청(淸)나라을 세워 3백년 가까이 중국 대륙을 지배했지만 오늘날에는 대부분이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인 고유언어와 풍습을 잃어버린채 중국의 한민족(漢民族)으로 흡수되었다.
심지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에베레스트산의 히말라야 산맥 밑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의 성지인 달라이라마가 살고 있는 티벳까지도 오늘날 중국이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중국의 심장부라고 하는 요동지방(遼東地方)을 점령하여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을 거쳐 1백여년을 고구려가 통치하였고, 요서지방(遼西地方)은 백제의 무왕(武王)이 지배했었다.
우리민족에게 고구려라는 나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활한 영토인 만주벌판에서 활을 쏘며 말달리는 고구려 고분벽화속에 진취적인 전사들의 모습이다.
고구려는 광대한 대제국이었으며 당나라 황제의 눈에 화살을 꽂을 만큼 담대한 용맹을 타고난 기마민족의 조상으로써 우리역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중국과 “맞장”을 뜬 나라로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멋있고 자랑스런 대제국이였다.
우리민족의 역사적 자긍심과 긍지를 심어준 나라로써 고구려는 우리가 결단코 중국에게 양보할 수 없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옷한벌, 한벌이 붉은선열로 물들여져도 절대 끝낼수 없는 중국과의 역사 전쟁인 것이다.
고구려는 우리민족에게 영화(榮華)의 추억을 기억하는 기념비적 역사인 것이다.

반면 우리민족은 중국으로부터 2천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 종교등 지리적으로 가깝고 또한 모든 분야에서 압도적인 문화적 영향을 받고, 사대조공(事大朝貢)을 바쳤지만 결코 우리 민족은 중국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지 않고 엄연히 다른 언어와 풍속 생활습관을 지키면서 민족문화를 발전시켜온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2천5백년전부터 수많은 전쟁을 통해 중국 대륙의 수백개의 민족국가들이 한족(漢族)으로 통일되어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륙의 동쪽끝에 위치한 우리 민족만이 유일하게 중국에 흡수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었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렇게 된 근본원인은 우리민족만이 가질 수 있는 뛰어난 문화적(文化的) 수용력(收容力)과 창조력(創造力)을 가지고 인도와 중국에서 일어난 불교와 유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우리 나름대로 한국적인 문화로 그들보다 더 훌륭히 발전시켰기 때문
에 우리 민족은 결코 중국에 흡수되거나 동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적으로 중국의 역대 통일왕조 국가는 3백년을 넘긴 나라가 없으나 우리민족의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왕조 역사는 최고 1천년에서 6백년 통일왕조 국가를 이어온 것은 전세계에서 우리민족 뿐이 없다. 특히 전주 이씨라는 순수한 단일 혈통으로 조선왕조 5백년 역사를 이어온 민족은 전세계에서 유래를 찾을수 없을 정도이며 인류역사상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중국의 사회제국주의 서막(序幕)」

중국인은 그들 스스로 민족적 우월성을 갖고 중화중심의 문화국가 개념을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민족국가 개념이 없었다.
다시말해 5천년간 이어져온 역사 속에서 중국황제를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天子)로 숭배하면서 중국대륙뿐만 아니라 온 세계가 한족(漢族) 중심의 천자에 나라인 중화사상(中華思想)을 갖고 중국외의 모든 나라를 국가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변방의 소수민족(오랑캐)으로 치부하면서 민족적 자긍심을 갖고 살아온 한족이다.

그러나 1978년 덩샤오핑(鄧少平)이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중국이 살아남을수 있는 정책이 개혁개방으로 미국등 선진국을 비롯한 세계의 여러나라속에 중국이 하나의 국가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민족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 변화속에 등소평이 중국 지도자로써는 처음으로 1974년 UN에서 중국의 “반패권주의” 입장을 천명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중국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초강대국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중국이 어느날 낯빛을 바꿔 초강대국으로 변하고 세계에서 패권 국가를 자청하며 곳곳에서 다른나라 사람들을 모욕하고 침략하고 수탈한다면 세계의 인민들은 마땅히 중국에 사회제국주의라는 모자를 씌워야 하며 그 사실을 폭로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민들과 함께 그것을 타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편 등소평과 함께 프랑스 유학을 같이했던 저우언라이(주은래:周恩來)는 70년대 초 중화인민공화국 초대총리를 역임할 당시 고구려와 한반도의 고대사는 한국역사라고 밝힌바있다.

21세기에 접어든 중국이 경제.군사적으로 모든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안으로는 55개의 소수민족들을 묶어놓고 밖으로는 16개의 국경지대가 접해있는 국가들로부터 영토분쟁을 사전에 막기위해 우리나라돈 2조8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들여 국경지대를 평정하기 위해 서부공정. 운남공정. 동북공정. 북부공정의 “공정(工程)”작업을 착수한 것이다.

중국의 지난 역사를 분석하면 수백년간의 통일왕조를 거치면 뒤이어 분열의 시대를 맞이한다. 일정기간 분열하면서 중국대륙이 재통일을 이룩하고 또다시 분열하는 역사의 반복속에 21세기를 맞이하여 전세계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겪으면서 지금은 민족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동북공정 (東北工程) 의 문제점

중국 동북 변경지방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일련의 연구 작업을 뜻한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 계획의 이 프로젝트는 중국 사회과학원 소속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 주관이 되어 고구려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2천여명의 학자들에게 영웅심을 불러 일으키며 고구려 역사왜곡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공정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 중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조선, 발해 등 한국 고대사와 관련된 연구들이 한국사를 크게 왜곡하면서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며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은 55개 소수민족들이 서로다른 수십개의 언어와 혈통과 생활 풍습이 전혀 다른 13억인구를 중화한민족으로 묶어놓고 있으면서 5천년 역사와 전통을 갖고있는 배달민족(倍達民族)인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같은 계통의 언어, 핏줄과 풍습을 지닌 한겨레의 피붙이조차 서로다른 민족으로 찢어놓고 있다.

동북공정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북한의 탈북자가 계속 늘어나면서 동시에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2001년 연변의조선족을 포함하여 재일동포, 재미동포등 재외동포에 관한 법적지위를 인정하는 법률안이 통과되자 중국이 크게 자극받아 미리 고구려고분 벽화를 유네스코의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시켜놓고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의 지방정부로 역사를 왜곡하게 된것이다.
중국영토내에 있는 고구려는 당연히 중국역사이며 한반도에 있는 고구려도 중국변방국가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고구려사 뿐만 아니라 고조선사와 발해사까지도 한국사의 영역에서 제외시키고 있는데, 이렇게 된다면 한국역사는 시간적으로는 2천년,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에 국한되어 한국사의 근간을 크게 흔들어 놓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왜곡에 대해 흥분하거나 감정을 앞세울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이성을 갖고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부가 아니라 독립된 강대국이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다.

5세기 동북아세아의 정세는 북방의 기마민족인 거란, 여진, 몽골까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예속되어 있었다. 위, 진, 남북조시대를 거쳐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나라는 북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고구려가 최대의 적이었으며 고구려를 제압하기 위해 국운을 건 전쟁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그당시 수나라는 3백년간 5호16국으로 분열되었던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얻은 자신감과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수양제가 직접 1백만 대군을 앞세워 고구려를 3차에 걸쳐 침략하였으나 을지문덕 장군에 의해 살수대첩에서 섬멸되어 멸망하였다.
그당시 수나라 백성들 사이에 남자로 태어나면 요동땅에 끌려가 고구려 병사의 화살에개죽음을 당한다는것을 슬퍼하는 요동낭사가(遼東浪死加)라는 민요가 유행했다.

수나라에 뒤를 이은 당나라 태종 이연과 그아들 이세민부자(父子)가 직접 50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의 안시성을 5년간 3차례나 침략해왔지만 연개소문장군에 의해 섬멸 당했다.
당태종은 안시성전투에서 고구려장군 양만춘에 의해 눈알이 빠지는 큰 부상을 당해 죽으면서 다시는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 것을 그아들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그당시 수, 당나라의 전투는 국운을 건 전쟁으로 수나라의 백만대군과의 전쟁에서 패하게되면 나라자체가 멸망하는 중대한 전쟁을 고구려는 한번도 패한일이 없었다.
이것이 어찌 중국의 지방정부와의 전쟁이었는가!
고구려에 대한 치욕적인 과거사를 덮어보려고 중국은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정복했던 요동땅을 잃어버린것도 억울한데 고구려 역사까지 왜곡당하고 있다. 중국이 계속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면 우리는 중국의 가장 큰 약점인 소수민족자치주와 국교를 정상화 시켜 강력하게 대응해 나가야 할것이다.
그 방법논으로
첫째: 대만, 홍콩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둘째: 신장, 위그루자치주 수장을 비롯한 티벳자치주의 지도자 달라이라마를 국빈초 청하여 그들과 회담을 갖고 정식국가로 인정하면 중국은 크게 자극받아 더 이상 무리하게 동북공정작업을 추진하지 못할 것이다.

「동북공정의 추진이유」

첫째 : 동북3성(길림성(吉林省), 요녕성(潦寧省), 흑룡강성(黑龍江省) 지역의 전략적 가치가 증대함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을 주장하려는 것임을 지적할 수 있다.
사전에 이 지역의 역사를 중국사로 공언해 둠으로써 북한의 붕괴나 남북통일 이후 국경문제등 향후의 상황 변화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한반도 정세에 대해 중국이 예상하는 최악의 경우는 남한에 의한 흡수 통일과 이로인한 한반도에서의 미군이 계속 주둔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압록강변에 미군이 주둔하여 최첨단 고성능 미사일이 중국의 심장인 요동땅을 겨냥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둘째: 한반도 통일과 관련해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남한 중심으로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북한의 공산당 고위 간부들과 군지도부가 무기를 소지하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넘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중국내에 북한의 망명정부가 들어서게 되면 2백만명의 조선족이 살고있는 동북지방에 수십만 또는 수백만명의 탈북자와 함께 무기를지닌 북한지도부가 자리잡게되는 사태를 중국은 결코 원치 않을것이다.

셋째: 한반도가 통일되면 중국과 간도지방을 놓고 영토분쟁이 벌어질 것이다.
동북공정은 통일 한국의 만주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이 고구려사를 삼키기 위한 역사적 작업이 아니라 장차 한국과 중국과의 영토분쟁에 대비하기 위한 고도의 정지작업이면서 한편으로는 향후 중국중심의 동아시아 정책과 아시아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전단계의 정지작업 이기도하다.

넷째 : 자국내 55개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운동을 봉쇄하기 위한 사전조치의 일환이다. 어느날 갑자기 티벳, 신장, 위그루, 조선족등 자치주의 소수민족들이 중화사상에서 벗어나 분리 독립 운동을 펼쳐지게 되면 다른 수십개의 소수 민족들이 연쇄적으로 민족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중국영토의 3분의1이 없어지게 되고 중국은 또다시 2천5백년전의
춘추전국시대로 되돌아가 4분 5열이 될것이다.
이와같은 현상은 유럽의 발칸반도에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소수민족들이 민족주의운동을 펼치면서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카자흐스탄, 리트아니아등 옛소련 연방의 16개 국가들이 분리 독립 되었으며 러시아의 체첸공화국은지금도 끊임없이 민족분쟁을 일으키며 독립을 요구하면서테러를 자행하고있다.

이러한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 지도부의 장쩌민(張澤民)과 베이징의 원로들은 민족분쟁이 국가존립에 대한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83년부터 단계적으로 국경지방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원 소속의 국가기관인 변강사지연구소를 설립하게 된것이다.
북부공정→ 내몽고, 만주의 북부접경지방의 자치주.
서부공정→ 티벳, 신장, 위그루족(이슬람권 종족과 문화를 갖고있음)의 자치주
운남공정→ 사천성 자치구로써 남쪽은 베트남, 라오스 서쪽은 미얀마와 접해있는 국경의 변방으로 전체 55개 소수민족을 평정하기 위해 이들 자치구를 강하게 통제할 계획을 세우고 공정작업을 진행 시킨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정부는 조선족 문제와 한반도 통일과 관련한 문제등에 대해 국가차원의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잃어버린 간도땅을 되찾을수 있었다」

1946년 중국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팔로군이 장개석(張介石)이 이끄는 국민당군을 본토에서 대만으로 완전히 밀어내고 중국 공산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때 중국의 동북 3성 (동북 공정이 진행되고 있는 옛고구려의 영토)에서는 조선족으로 구성된 3개사단 이상의 팔로군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중국 공산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 당시 조선족 군대는 독립군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과 끊임없는 전투를 통해 많은 실전 경험을 갖고 있었던 막강한 군대였다.

모택동도 조선족군대의 헌신적인 공로를 높이 치하했으며 이러한 공로의 댓가로 소수민족인 조전족이 연변과 백두산 두군데에 자치주를 갖게 되어우리말과 글을 쓰며 한민족의 전통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아 우리의 풍습을 이어올수 있었다. 모택동은 조선족에게 이중국적을 승인하여 중국에 정착할 수있도록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해주는 특혜를 주기도 하였다.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을 가장 높이 평가했고 조선족의 위상을 높이 치하하며 우대했다.(현재는 연변만 조선족 자치주임)

조선족들은 모택동의 팔로군 형성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맹활약을 했으며 조선족의 무정장군등은 팔로군의 주역으로 중국의 전쟁영웅인 주덕장군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예우를 받았던 사실을 그당시 독립군으로 함께 참여했던 광복회의 생존하신 애국지사 어른들께 직접 들었다.

한편 모택동의 팔로군과 장개석의 국민당군과의 전쟁이 끝난이후 이들 대규모의 조선족 군대가 필요없게 되었다. 반면 중국으로서는 조선족군대가 위협적인 집단이 되었다. 왜냐하면 만주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국이 지배를 해본적이 거의 없었으며, 이 지역에서 중국과 북한과의 영토분쟁이 일어날 경우 조선족 군대는 당연히 북한쪽편을 들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중국은 큰 부담을 느끼게 된것이다.
이러한 때에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조선족군대를 북한에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다.
김일성은 6.25 남침을 위하여 모택동에게 군사적지원을 요청하게 되자 모택동의 입장으로는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즉시 팔로군 내의 조선족 부대 약60,000여명의 대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북한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이 훗날 북한의 연안파로 세력을 구축하였으나 한국전쟁이후 김일성에 의해 대규모 숙청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들 조선족 부대의 지원자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고향을 둔 청년들이었으며 농사를 짓기 위하여 또는 일제의 압제를 피해 고향을 뒤로하고 만주로 이주한 우리 민족이었으며 중국 팔로군에 들어가 일본군과 맞서 싸운 독립군이기도 했다. 해방이후 김일성은 이들을 불러들여 한국전쟁을 일으킬것이 아니라 우선은 만주일대의 조선족 거주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여 이지역에서 옛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민족분쟁을 야기시켜야 했다.

그 당시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몰아내기는 하였으나 광대한 중국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힘든 과도기적 상황 이었으며 또한 여러 군벌들이 난립되어 북한보다 훨씬 국가적인 체제를 갖추지 못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1천년만에 찾아온, 우리 한민족의 옛영토를 회복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닥쳐왔었다. 특히 민족성이 강한 독립군으로 구성된 조선족 부대가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좋은 기회였다.
최소한 백두산 일대라도 완전한 한민족의 영토로 확보할수 있었다.
(백두산 일대의 영토가 경상남북도를 합친것보다 크다.)
광활한 만주의 옛영토 회복의 결정적 기회를 놓친 김일성은 우리 한민족에게 가장 큰반역을 저지른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전쟁에서 압록강까지 밀리자 중공군을 끌어 들였으며 여기에 대한 보상으로 북한과 중국이 협의하여 백두산 천지 주위의 15봉우리 중 8개를 중국에 내주면서, 백두산 천지를 관통하는 국경선을 확정한 것이다.
그 당시 북한지도부는 역사의식을 갖고 먼 훗날을 대비하여 백두산일대를 최소한 영토분쟁지역이라는 형식상의 발표라도 했었다면 지금 중국이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고구려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작업을 쉽게 추진하지 못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옛영토 연해주와 간도땅을 회복하자」

우리가 민족이라함은 같은 핏줄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족을 말하는 것이다.
동북3성의 조선족은 같은 언어와 같은 핏줄과 생활습관등 모든 것이 우리와 같은 동족이 거주하고 있는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은 우리 영토이며 같은 배달민족이기 때문에 광활한 요동땅과 연해주와 간도지방은 당연히 조선 영토라는 논리가 합당한 것이다.

간도지방은 압록강 이북의 서간도와 두만강 이북의 북간도 땅을 간도지방이라 하며 남만주지역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세종대왕때 김종서장군에 의해 1434년에 6진이 개척되어 조선영토로 확정되었으며
청나라 강희제때 이미 남만주땅을 조선영토로 인정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또한 19세기 서양인이 그린 지도에도 간도지방이 조선영토로 분명히 표기 되어있는 신뢰할만한 역사적 사실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해방이후 우리의 위정자들은 간도지방 영토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 무능. 무관심해서 외교적으로나 학술적으로 한번도 거론한 적이 없다.
목숨걸고 지켜서 물려준 영토를 잃어버린 못난 후손들을 원망하며 광개토대왕을 비롯한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이순신장군이 지하에서 통곡하고 계실 것이다.
우리는 지금 위대했던 조상앞에 대역죄를 지고있다.

1992년 중국과 수교할 때 미래를 위해 비공식적이나마 간도문제를 제기하고 넘어가자는 의견이 일부에서 제기 되었지만 묵살되었다.
이런식으로 시간이 흐르면 간도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영영 잃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남북간의 분단이데오로기의 원인도 크게 작용한 비극적 현실이다.
지금은 남북 화해와 경제협력으로 공동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잘못된 한.일 을사조약의 문제점을 거론하여 국제사회에 끈임없이 문제 제기를 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남만주 지방의 간도땅을 우리의 영토라고 중국에게 한번도 주장한 일이 없었다. 일본과 청나라가 지난 1909년 체결한 간도협약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김원웅 의원이 여야의원 59명의 서명을 받아 2004년 9월 정기국회에 제출했다. 우리민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조선의 외교권을 갖고 있었던 일본이 우리나라의 영토인 간도지방을 자신들의 임의대로 청나라에게 넘겨준 것은 원천무효다.

러.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간도지방은 분명한 조선영토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희생시키면서 간도협약을 통해 중국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간도협약을 통해 만주철도 부설권과 석탄채굴권등 이권을 얻는 대신 조선의 영토였던 간도지방과 연해주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조선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으로 축소하여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그 결과 만주철도를 따라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길을 터 놓았고 만주의 석탄 채굴권등을 확보하면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중.일 전쟁을 통해 중국대륙을 점령하게 된다.
우리조상의 영토였던 남만주일대의 간도땅이 중국에 넘겨진 것은 한.일합방 자체가 무효이기 때문에 이문제를 국제헌법 재판소에 제소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영토 간도지방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구약성경을 응용하면서 2천년전의 가나안땅(예루살렘)을 되찾으면서 팔레스타인을 몰아내는 과정에 미국의 정치와 제계의 유대인들을 배경으로 국제 여론과 힘을 이용했다.
우리도 남북통일을 이룩하여 배달민족(倍達民族)의 힘으로 간도지방의 옛영토인 만주벌판을 되찾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것이다.
동북공정을 통한 중국의 역사 왜곡 시도는 단순히 고구려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땅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고착화 하려는 숨은 의도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길림성 연길시 연화촌은 간도지방의 심장부와 같은 천연요새인 이곳은 일찍이 홍범도 장군이 대한독립군 사령부를 두었고 김좌진장군도 일정기간 주둔한바 있다.
연화촌 북쪽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부대의 신병 훈련소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동북항일연군의 활동무대 가운데 한곳이었던 고성촌은 작가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 무대이기도 하다.
또한 가곡 “선구자”의 주무대인 용정의 일송정이 있는 곳이며 민족시인 윤동주의 묘소가 있는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1911년 10월 10일 손문의 신해혁명을 통해 중국대륙에서 만주족을 몰아내고 명나라 이후 3백년만에 한족인 손문, 장개석,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장택민등에 의해 다시 중국본토를 회복하게 된것이다.
21세기의 중국은 경제, 군사적으로 힘이 막강해지면서 강력한 중국을 만들기 위해 역사왜곡을 통해 자국민을 뭉치게하여 중화 한민족을 창출해 가는 과정에 있다.

일본이 1965년 동경올림픽을 통해 국력이 신장되자 미국과 소련에게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패전국 전쟁보상으로 빼앗겼던 일본영토의 오키나와 섬을 미국에 반환요청을 했고 소련에게 빼앗겼던 사할린 섬(사할린은 원래 러시아 영통였으나 러.일 전쟁후 전쟁배상으로 남쪽섬 절반 이상이 일본 영토가 되었다가 다시 태평양 전쟁후 러시아가 사할린땅을 완전 회복 하였다.)을 포함한 북해도와 연결된 쿠일열도의 여러개 섬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일본의 역대정권부터 고이즈미 총리에 이르기까지 끈임없이 지금도 요구해 오고 있다.

일본은 우리가 뭐라하든 50년이 넘게 한해도 빼지 않고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지명을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일본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매년 연래행사처럼 우리 정부와 협상도 하지 않고 계속 UN에 문제제기를 해왔다.
그러자 50년 세월이 지난 지금 UN은 독도를 국제영토분쟁지역으로 만들어 놓았다.
우리도 계속해서 우리의 영토였던 간도지방을 불법으로 빼앗겼던 역사적근거와 함께 문제제기를 해서 국제사회의 여론을 불러일으켜 한.일을사조약 자체가 무효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간도땅을 되찾는 노력을 했어야 옳았다.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 가증스럽기는 해도 배울만한 점이 있다.
우리나라도 장차 중국, 러시아에 영토문제를 제기하면서 일본의 국제외교력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응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문제 제기가 50년을 넘었고 중국도 동북공정 작업을 10년전부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만 천하태평(天下泰平)이었다.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학계에 맡기자고 주장하는 얼빠진 자들도 있는데 이것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학술지에 글 몇페이지 올린다고 해결될 사항이 아니다.
영토문제가 어디 학문적 문제인가 우수논문 발표한다고 영토가 지켜질 것인가 중국은 사회과학원 소속의 국가기관에서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책정해 “공정(工程)”
작업을 국가 차원에서 진두 지휘하고 있다.

오는 2009년이면 간도지방을 빼앗긴지 꼭1백년이 된다. 6년후면 시효도 끝난다.
침묵만하면 자칫 국제법상 지위를 잃고 간도땅은 영원히 중국으로 넘어가게 된다.
중국에 말도 못하고 속만 끊이는 북한몫까지 우리 정부가 해야 한다.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모르고 조상을 잃어버리는 이치와 똑같다.
다시말해 역사는 우리의 정체성이며 역사는 우리 민족의 족보이다.
그래서 역사라는 것은 국가를 유지해온 밑거름이며 그 국가와 민족의 “영혼”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지키는 것이 곧 우리민족을 지키는 것이다.
고구려 역사를 한국역사로부터 떼어내어 중국역사로 편입시킨 것은 역사 테러인 것이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한민족의 민족적 자부심을 키워야 한다.
중국은 어려서부터 “중화사상”으로 민족적 자긍심을 갖을수 있도록 국가에서 철저히 교육을 시키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금 때늦은감은 있으나 앞으로는 국가고시때 특히 사법, 행정, 외무고시와 공무원 채용시험때 국사를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으로 전환해서 우리의 역사문제를 근본부터 체계적이고 적극적으로 다뤄야 한다.

고구려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단10여명으로 극소수에 지나지 않은 원인은 고구려 영토 자체가 북한지역에 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학자들이 연구할수 있는 영역의 한계를 갖게 된 것은 남.북간에 냉전이데오로기의 원인중에 하나가 될 수있다. 앞으로는 남북학자들이 공동으로 고구려 역사를 심도있고 활기차게 연구하여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해야 할것이다.

끝으로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이 대한민국 국보1호로 지정되고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이 보물1호로 지정된 비극적인 사실을 밝혀보자
1943년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는 숭례문을 폄하해서 남대문으로 조선문화제 1호로 등재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加等淸正)이 남대문을 통과해 한양을 함락시켰던 사실과 동대문은 가등청정과 선봉을 담당한 고니시 유키나가 (소서행장:少西行狀)이 동대문으로 입성해 서울을 함락시킨 승전문(勝戰門)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조선문화제 1호로 지정하게 되면서 일제 잔재의 가장 치욕적인 문화재가 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우리 문화재를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1962년 만들어진 문화재법이 일본 식민지 시대의 문화재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숭례문에 대한 문화재적 가치를 검증하지도 않고 일제 잔재의 뿌리를 그대로 간직한채 대한민국 국보 1호로 지정하게 된것이다.

우리는 역사의식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 해악으로 국민들에게 악영향(惡影響)을 끼치는지 대한민국 국보1호인 숭례문을 통해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할것이다.
일본이 끊임없이 역사왜곡을 하고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침탈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체계적으로 역사교육을 더욱 강화하여 철통같은 국가주의 사관으로 국민들을 무장시켜 우리민족의 기상을 드높여야 할 것이다.






2004년 9월 17일

한국 독립유공자 유족회 이사 이 건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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