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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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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확실한 것’을 좋아합니다. 정치, 경제, 미래 계획까지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은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그렇게 매달리는 확실성 가운데 많은 것이 거짓입니다. 정치적 구호를 떠올려 보십시오. “반드시 ~하겠다”는 그럴듯한 선언들이 실제로 얼마나 자주 실현되지 않습니까. 그 확신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하는 허상일 때가 많습니다.
왜 현대 사회는 이렇게 확실한 것을 추구할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하기 어려워하고, 그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확실한’ 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또한, 경제적 안정이나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욕구도 한몫 합니다. 사람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위험을 피하고 싶어 하며, 그 결과로 확실하게 보이는 것에 의지하게 됩니다. 확실성을 제공하는 것이 마치 안전망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안전망이 결국 허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시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렘 28:2, 개역개정) 말씀하셨다며, 유다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대로, 유다가 회복될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 확실성에 안도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확신은 거짓이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멸망했고, 예레미야는 하나냐와 대립하며 진리의 메시지를 외쳤습니다.
예레미야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회복이다.” 하나냐와 예레미야의 대립은 바로 거짓된 확실성 vs. 참된 불확실성의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냐는 사람들이 원하는 확실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예레미야는 불확실해 보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을 고백했습니다. 그의 말은 불확실했습니다. 아니, 불안정해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나라의 미래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정직한 불확실성’이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 거짓된 확실성보다 더 진실한 것은, 불확실해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불확실성의 세계로 들어서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확실한 이 세상에서, 부활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불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부활이야 말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참된 진실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초대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부활은 바로 이 '희미한' 세계에서 '온전한' 세계로 나아가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확실하고 흐릿한 모습을 보고 있지만, 부활을 믿는 믿음은 언젠가 그 불확실성 너머에서 완전한 진리를 보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부활절 아침의 감격을 누리며 예배한 모든 독자들에게 ‘거짓된 확실성에서 참된 불확실성으로’ 들어가는 복이 임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