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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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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명은 잠을 적(敵)으로 규정하곤 합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는 24시간 깨어 있을 것을 종용하고, 스마트폰의 푸른 빛은 우리의 수면을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심지어 잠은 ‘패배자의 휴식’이나 ‘생산성의 손실’로 치부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잠들지 못하는 도시에서 가장 불티나게 팔리는 것은 수면제와 명상 앱, 그리고 숙면을 약속하는 비싼 베개와 매트리스입니다. 몸은 침대에 누워있지만, 영혼은 여전히 치열한 전쟁터를 배회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이겠지요.
왜 우리는 잠들지 못할까요? 작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현대인의 불안을 ‘지위 불안’으로 진단했습니다. 과거에는 가난이 그저 불운일 수 있었지만,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실패는 곧 ‘무능’이라는 낙인이 됩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매혹적인 구호는 뒤집어 보면 “실패한 것은 온전히 네 탓”이라는 잔인한 비난이 되기도 합니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내야 하는 우리에게, 잠은 위험한 공백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잠든 사이에 누군가 나를 앞질러 갈 것 같고, 내가 눈을 감은 사이에 힘겹게 쌓아 올린 성벽이 무너질 것 같은 공포가 우리의 잠을 방해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을 아주 정교한 단어로 묘사합니다. 시편 127편에 등장하는 “수고의 떡”에서 ‘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체브’는 단순히 땀 흘리는 노동이 아니라, 뼈를 깎는 고통과 존재론적 불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책임지려는 인간이 밤 늦게까지 자지 않고 먹는 떡이 바로 ‘수고의 떡’이요 ‘불안의 떡’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집을 세우는 건축주이고 내가 내 성을 지키는 유일한 파수꾼이라고 믿는 한, 우리는 결코 깊은 잠에 들 수 없습니다. 건축주가 자리를 비운 건물은 위태롭고, 파수꾼이 잠든 성문은 무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시인이 말하는 ‘잠’은 파격적인 신앙 선언이 됩니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시127:2)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불면증을 치료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잠은 인간이 창조주에게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신뢰의 고백’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잠든다는 것은 “오늘 밤, 내가 이 세상을 지키지 않아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고, 내 인생의 경영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는 겸손한 의식이 바로 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안식의 원리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완성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마6:26, 28). 새는 창고를 짓지 않고 백합화는 길쌈을 하지 않지만, 그들은 평안합니다. 그들을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라는 든든한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안을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주권의 문제’로 보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말씀은 불안을 억지로 없애라는 압박이 아닙니다. 불안의 주소를 옮기라는 초대입니다. 내가 왕 노릇 하며 전전긍긍하던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는 나라 안으로 들어오라는 따뜻한 부르심입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망망대해 위 작은 보트에서 호랑이와 함께 표류하는 소년이 나옵니다. 소년은 처음엔 호랑이 때문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지만, 나중에는 그 호랑이 덕분에 깨어 있게 되고 결국 생존합니다. 우리 삶의 불안도 이와 비슷합니다. 불안은 우리를 파멸시키러 온 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힘의 한계를 절감하게 하고, 보트의 진짜 주인인 하나님을 붙들게 만드는 은혜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안식은 불안의 완전한 제거를 뜻하지 않습니다. 불안이라는 호랑이가 보트 구석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어도, 이 배를 운행하시는 분이 풍랑을 잠재우시는 주님임을 믿고 잠을 청하는 것이 진짜 안식입니다. 잠들지 못하는 이 도시의 밤을 이기는 길은 더 좋은 수면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건축주를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 밤, 베개에 머리를 누이며 이렇게 고백해보면 어떨까요. “하나님, 오늘 하루 최선을 다했지만 제 한계는 여기까지 입니다. 제가 잠든 사이 주님이 일해 주십시오. 당신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저의 파수꾼이십니다.” 이 담대한 신뢰가 시작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잠, 하나님 나라의 평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