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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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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15-22 칼럼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담임목사 허요환

    은혜와 정의는 언제나 그렇듯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정의가 없는 은혜는 묵인으로 변질되고, 은혜가 없는 정의는 무자비한 폭력이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정의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계실까요? 원수를 사랑하라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에 비춰보면, 단연 정의나 공정보다는 은혜와 긍휼을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실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죄악 된 본성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28-31절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은 인간의 참혹한 상태를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능욕, 교만” 등으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들의 삐뚤어진 상태를 들보와 티로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눅 6:41-42) 타인의 눈에 들어 있는 티에 집착하며 비난하고 정죄하는 반면,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무시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시선의 이동을 권하십니다. 타인을 비난하고 흠집 내는데 익숙했던 시선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일종의 기독교식 자아 성찰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떻게 맹목적인 비난이 아니라 따뜻한 격려의 시선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빅터 프랭클은 외부의 자극과 그에 대한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공간에서 우리는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할지 “선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면, “너 때문에 기분이 나빠.” “당신 때문에 열 받아.” 이런 표현은 내 감정이 상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고 단정합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 표현 이면에는 우리의 욕구가 숨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시선을 돌린다는 것은 바로 그 욕구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보고 “너희들 때문에 기분이 나쁘다. 너희로 인해 거룩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 비난을 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다르게 반응하셨지요. 그들의 과거 외로움과 아픔과 상처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반응은 “내가 당신으로 인해서 마음이 아프다.”였습니다. 작지만 큰 차이입니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거친 말로 인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나는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외부의 자극에 대해 반응하기에 앞서, 우리 스스로 어떤 반응을 할지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며 예수님을 모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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