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거리

자유롭게 개인의 생각과 마음을 나누고, 좋은 자료를 공유 하는 공간 입니다
김인수
05교구
* 성경이 이야기하는 건강한 용서
2024-04-25

 

 

*49) 주기도문 8번째 

 

마태복음 6장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 이런 제목의 말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분노 성찰적인 분노는 좀 다릅니다. 

 

이것은 어떤 잘못된 행위, 어떤 내가 피해를 입게 되었을 때

이것을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생각해 보는 겁니다. 판단하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지금 분노하고 있는지, 이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이런 일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생각한 후에 분노하는 겁니다. 

 

즉각적인 분노가 윤리적인 판단 이였다면, 성찰하는 분노는 도덕과 윤리적인 판단이 이루어진 후에 나타나는 분노입니다. 

 

그래서 장발장과 같은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똑같은 범죄 도둑질이지만, 그 경우 그 어떤 사건의 배후의 여러 가지 이유를 알고 나면 어떻습니까? 

이 분노의 감정이 바뀌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도덕적인 분노 성찰적인 분노라는 겁니다. 

강아지를 보니까, 강아지는 성찰적인 분노가 없습니다 

 

본능적인 분노밖에 없어요.  

자기 몸이 아프니까 바로 그냥 으르렁 됐지만, 사실 따져 놓고 보면 제가 나쁜 짓 한 게 아니고 

이 강아지를 위해서 그 진드기를 잡아 준 거잖아요. 

 

그러면 이 강아지에게 그런 판단 능력이 있다면, 가만히 생각을 해보고 이게 잠시 잠깐 나에게 아픔이 있지만 

결국은 이게 나에게 좋은 거구나, 이걸 생각하게 되면 어떻겠어요?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큰 저를 올려야죠, 근데 그게 없는 거예요. 

왜 동물에게는 본능적인 분노만 있지만 성찰적인 분노가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분노는 뭐냐?

파괴적인 분노가 있어요.

 

이거는 즉각적인 분노와 도덕적인, 성찰적인 분노가 지나치게 발전해 가지고 파괴적인 분노가 되는 겁니다.

 

앞선 성찰적인 분노라는 것이 나쁜 행위 어떤 가해한 초점이 있다면, 이 파괴적인 분노는 가해자에게 초점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핍박한 저 나쁜 놈, 저놈은 악마야 저건 사탄이야 마귀야 저거는 바퀴벌레 같은 존재야.

저건 지옥불에서 타서 죽어 버려야 돼

 

이렇게 완전히 비 인격적인 존제로 완전히 판단을 구쳐 버린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증오가 들끓는 겁니다. 

이런 게 파괴적인 분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분노를 가만히 살펴 놓고 보면.

분노라고 하는 것이 다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라고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나올 수 있는 아주 대단히 건강하고도 바람직한 감정입니다.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하면 누구나 다 이 분노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다만 문제는 이런 가해행위를 당하게 되었을 때에, 그 가해 자를 향해서 너무 지나치게 증오하고, 또 복수의 어떤 마음 이 불타게 되면, 나 역시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서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용서가 무엇일까?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 건강한 용서라는 게 뭡니까?

 

건강한 용서라는 것은 일단 내 안에서 분노의 감정이 일어났다, 이걸 인정하는 겁니다. 

나에게서 지금 뭔가 피해가 있게 되고 누군가가 나를 괴롭힘으로 인해서 내 안에서 분노가 일어났다

 

이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분명히 지금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 가지고 마음이 아파하고 분노하고 있는데 그런 감 정을 억지로 억누르는 것,이게 건강한 용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 또 다른 의미의 폭력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건강한 용서는 뭐냐?

이제 그렇게 내 안에서 일어난 이 분노에 감정을 어떻게 다스릴 것이냐에 문제입니다.

 

이 분노의 감정을 파괴적인 분노가 되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도덕적인 성찰을 통해서 건강한 분노로 만들 것인지, 이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괴롭게한자, 그냥 무조건 악마로 만들고 마귀로 만들고 사탄으로 만들고 지옥에나 갈 놈 바퀴벌레 같은 놈 이렇게 저주를 퍼붓고 증오가 생겨나고, 그렇게 되다가 결국은 복수의 일까지 일으키는 그런 일을 하지 않도록 우리의 감정과 분노를 다스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뭐 하는 겁니까?

일만 달란트 빛 진자의 비유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 가해자나 나나, 똑같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느끼는겁니다.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거예요. 

 

저 사람이 나쁜 짓을 했지만 알고 보면 저 사람 안에도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겁니다. 

동시에 나도 혹시 잘못하면 저런 나쁜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또 다른 가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민의 감정을 갖는 겁니다.

 그리고 저 사람과 내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갈 것인가?

 

이것을 위해서 결단하는 게 뭡니까? 이게 용서예요. 

이게 용서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용서는 그렇게 보면, 어떤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지난한 과정 가운데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2018,9,16, 주일 허요환 위임 임목사님 8번째 주기도문

                    설교내용 요약"

 
 
List of Articles
Go to Top